충전 표준, 테슬라는 먼저 깃발 꽂을 수 있을까?
시장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언제나 새로운 표준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벌어집니다. 특히 현대 산업 사회에서 표준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죠.
우선 하나의 표준이 제정되면 모든 업체가 이를 따르면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게 되고, 다양한 규격을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비용 낭비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또한 특정 규격이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되면 시장의 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는 만큼, 기업들은 자사의 규격을 국제 표준화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동차 시장의 패러다임이 전기차로 전환되는 시점에 새로운 표준 전쟁에 불이 붙었습니다. 바로 '충전 표준'입니다. 전기차 태동기였던 2010년대 중반에 등장한 여러 충전 규격 중 미국과 우리나라에서는 CCS1, 유럽에서는 CCS2가 표준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데요.
NACS, 도대체 뭐길래 충전 표준 전쟁이 일어난 걸까요? ⓒ Tesla
지난 6월, 미국자동차공학회(SAE)가 테슬라 독자 규격이었던 NACS North Amecrican Charging Standard를 충전 표준으로 채택하면서 다시금 화두에 올랐죠. 이미 적잖은 전기차가 보급된 2023년, 충전 표준 전쟁이 새롭게 시작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정말로 테슬라는 NACS로 충전 규격을 통일시킬 수 있을까요?
NACS와 CCS1의 차이?
우선은 각 충전 규격의 장단점을 살펴볼까요? 기존 미국 내 표준으로 쓰여온 CCS1의 경우, 5-pin 타입1 커넥터에 2-pin 직류 콤보 커넥터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완속 충전은 원형의 타입1 커넥터를 사용하고, 급속 충전 시에는 더 두꺼운 콤보 커넥터를 사용하죠.
‘DC 콤보’라고도 불리는 5-pin CCS1(왼쪽)과 유럽에서 널리 쓰이는 CCS2 ⓒ Mida
CCS1은 하나의 충전 단자로 완속과 급속 충전이 모두 가능하며, 고출력 급속 충전기 도입이 용이하다는 장점 덕에 급속 충전에 불리한 교류 3상, 충전 단자가 두 종류인 차데모(CHAdeMO) 등을 밀어내고 북미와 우리나라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유럽에서는 7-pin 3상 타입2 완속 커넥터와 직류 콤보 커넥터가 결합된 CCS2가 표준으로 쓰이고 있죠.
CCS1과 NACS의 충전 커넥터 비교. NACS 쪽이 훨씬 가볍고 콤팩트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 ArenaEV
반면 테슬라는 2012년부터 독자 규격인 NACS*를 사용해 왔습니다. NACS는 하나의 커넥터로 완속과 급속 충전을 모두 지원하며, 커넥터가 CCS1의 절반 크기에 불과해 큰 충전 단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대신 CCS1에 비하면 초급속 충전 적용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NACS라는 이름은 2022년 11월부터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충전 규격들은 저마다 장단점이 뚜렷한데요. 중요한 것은 테슬라는 유럽에서는 CCS2를, 미국에서는 NACS를 사용하며 지난 10년간 독자 규격을 고수해 왔다는 사실이죠. 그런 테슬라가 갑자기 NACS의 규격을 다른 회사에 공개하면서까지 충전 표준으로 밀어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표준 전쟁의 원인은 보조금!
테슬라는 NEVI가 발표되기 전까지 NACS 충전 규격을 공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 Tesla
사실 테슬라는 독자적인 충전 규격을 다른 자동차와 공유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미 북미 지역에 광범위한 독자 규격 충전 인프라를 구축해 뒀고, 경쟁사의 전기차들이 테슬라 충전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 효과도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런 테슬라가 갑자기 정책을 바꾼 것은 결국 '돈' 문제였습니다.
지난 2021년 11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기반 시설 투자 및 일자리 법 Infrastructure Investment and Jobs Act, llJA을 통과시켰습니다. llJA는 무려 1조 2,000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 내의 도로, 철도, 대중교통 등 여러 기반 시설을 정비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인데요. 전기차 보급을 활성화하기 위한 전기차 기반 시설 확충 프로그램 NEVI National Electric Vehicle Infrastructure 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NEVI가 불씨를 붙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요. 이 프로그램은 전기차 충전소 네트워크 구축에 무려 75억 달러(한화 약 9조 8,000억 원)을 투자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투자 비용이 충전소를 설치하는 제조사들에게 보조금 형태로 지급되면서 전기차 회사들이 앞다퉈 충전소 확충에 나선 것이죠.
그런데 이 보조금 프로그램에는 한 가지 제한이 붙어 있습니다. 바로 "비독점적이고 공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충전소"여야 한다는 것인데요. 테슬라가 설치한 충전소라도 다른 제조사 차량이 사용할 수 있어야만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전역에 충전 인프라를 깔아둔 테슬라는 NACS 표준화로 연방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을 통해 충전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자 합니다. ⓒ Tesla
테슬라는 이러한 내용이 알려지자 발 빠르게 NACS 규격을 다른 자동차 회사에 공개하고 표준화 작업에 나섰습니다. 다행히 상황은 테슬라에게 유리했죠.
미국 전역에 설치된 2만 8,000기의 급속 충전기 중 1만 7,000기, 그러니까 약 60%가 테슬라의 슈퍼차저입니다. 게다가 미국에서 팔리는 전기차 중 절반 이상이 테슬라 차량이죠. 그러니 당연히 NACS를 충전 표준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게 테슬라의 주장입니다.
보조금을 얻어내기 위한 전략이었지만, 미국 내 전기차 2대 중 1개가 사용하는 NACS를 표준으로 삼지 않을 이유도 없었죠. 결국 전기차 태동기부터 오랫동안 독자 규격과 인프라 구축에 공을 들여온 테슬라의 선구안이 빛을 발한 것입니다.
NACS VS 충전 동맹, 그 결과는?
볼보는 미국 외 자동차 히사 중 가장 먼저 NACS 도입을 발표했습니다. ⓒVolvo Cars
압도적으로 많은 충전 인프라를 지닌 테슬라가 NACS 규격을 오픈 소스로 개방하면서, 경쟁사들도 NACS 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테슬라는 앞으로도 충전소를 확장해 나갈테니 북미 시장에서는 자체적인 충전 네트워크를 구축할 부담을 덜 수 있죠. NACS는 오픈 소스라 로열티를 낼 필요도 없고요. 이미 닛산, 메르세데스-벤츠, 볼보, 제너럴모터스, 리비안, 포드 등이 NACS 도입을 예고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자동차 회사가 테슬라의 '천하 통일'에 공감하는 것은 아닙니다. NACS를 채택하면 앞으로 충전 네트워크 구축에 있어 테슬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장기적으로는 충전 인프라 분야에서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NACS를 사용하게 되어도 기존 CCS1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충전망 구축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한 '충전 동맹'이 지난 7월 결성됐습니다.
테슬라를 견제하기 위해 완성차 회사들은 충전 동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현대모터그룹 유튜브 캡쳐
BMW 그룹, 제너럴 모터스, 혼다, 현대, 기아, 메르세데스-벤츠 그룹, 스텔란티스 NV 등이 참여한 충전 동맹은 CCS1과 NACS 모두를 지원하는 급속 충전기를 북미 전역에 3만 기 이상 설치한다는 계획입니다.
특히 휴게소와 결합된 형태의 충전 편의 시설, 차량 및 애플리케이션과의 뛰어난 연동성, CCS1의 강점인 초급속 충전 등의 이점을 살려 테슬라를 견제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입니다.
미국에서도 충전 표준 전쟁이 벌어지면서 다른 시장에 미칠 여파에도 관심이 모이고 있는데요. 유럽과 중국에서는 테슬라도 각각 CCS2, GB/T 규격을 사용하지만, NACS를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NACS의 표준화를 추진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습니다. 다만 국내 전기차 시장을 주도하는 현대차그룹이 NACS 도입에 부정적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상황을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자동차 회사들의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표준 전쟁이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전기차 운전자들이 보다 편리하게 충전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전기차 보급량도 늘 테니 모두에게 윈-윈(win-win)이 아닐까요?
필진 엘제이
자동차 전문기자 출신 콘텐츠 에디터.
전기 자동차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풀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