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는 죽어서 배터리를 남긴다 : 전기차 폐차와 폐배터리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

아무리 수명이 긴 물건도 낡고 기능이 떨어지면 결국 폐기되고, 폐기물은 처리를 거쳐 자원으로 다시 활용되는데요. 내연기관차보다 고장이 적고 기대 수명이 긴 전기차 또한 언젠가는 기능을 다해 폐차의 수순을 밟게 됩니다.
본격적인 전기차의 상용화는 2010년대 이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직까지 노후화로 폐차되는 전기차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사고 등 다른 이유로 폐차되는 차량이 생기기 마련이니, 앞으로 늘어날 노후 전기차의 친환경적인 폐차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면서 전기차 폐차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는데요. 특히 전기차의 주요 부품인 배터리의 활용에 주목하고 있죠. 오늘은 전기차 떠난 그 후, 전기차의 폐차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전기차, 폐차해도 배터리는 남는다

ⓒ Bloomberg
전기차도 기본적으로 자동차이기 때문에, 폐차 과정은 일반적인 자동차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폐차된 차량은 등록이 말소되고, 분해되어 자원으로 재활용하거나 부품 단위로 팔리죠. 특히 전기차에는 고가의 전자 장치나 구리 배선 등 값어치 높은 원자재가 많이 쓰이는 만큼 적절한 가공을 거치면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기차의 여러 부품 중 폐차할 때 '특별대우'를 받는 것이 있으니, 바로 배터리입니다. 2021년 1월 1일 이전에 보조금을 받고 구입한 전기차의 경우 대기환경보전법에 따라 폐차 시 배터리를 지자체에 반납해야 합니다. 이는 노후화로 인한 폐차든, 사고로 인한 폐차든 동일하게 적용되는데요. 전기차 값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배터리를 반납 받아 효율적인 재활용 방안을 강구하기 위한 규정이죠.
설령 2021년 이후에 산 전기차여도, 배터리는 값비싼 부품인데다 활용 방안이 많아 단순한 해체 절차를 거치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폐배터리는 재사용 또는 기술 개발을 위해 통째로 매각됩니다.
심하게 파손되어 배터리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상품 가치가 없는 배터리는 어떨까요? 이런 경우에는 특수 공정을 거쳐 리튬, 니켈, 코발트 등 고가의 원자재를 추출해냅니다. 이렇게 추출한 원자재는 다시 새로운 배터리 제작에 쓰이고요.

폐배터리의 화려한 부활

해체되지 않는 폐배터리는 신품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지만, 여전히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일반적으로 잔존 수명 60% 이상인 배터리는 해체하지 않고 재사용되는데요. 사고 차량에서 떼어낸 배터리의 경우 성능과 안전성 평가를 거쳐 문제가 없을 때에만 재사용 대상으로 매각됩니다.
전기차 폐배터리는 성능 검사 후 재사용 또는 재활용 대상으로 분류됩니다. ⓒ SK이노베이션
폐배터리는 배터리 기술 연구 용도는 물론, 원래의 목적대로 전기 에너지를 저장하기 위해 쓰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ESS Energy Storage System, 에너지 저장 장치입니다. ESS는 잉여전력을 충전했다가 필요할 때 공급하는, 일종의 커다란 보조배터리라 할 수 있는데요.
폐배터리를 활용한 ESS. ESS는 친환경 전력망의 필수 요소입니다. ⓒ Connected Energy
특히 태양광발전, 풍력발전과 같은 신재생 에너지의 경우 원하는 시간에 전력을 생산하기 어렵기 때문에 ESS를 활용하면 발전량이 많을 때 에너지를 저장해뒀다가 야간이나 바람이 불지 않을 때 활용할 수 있어 친환경 전력망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전기차의 폐배터리는 이러한 ESS 구축용 자재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혹은 UPS Uninterruptible Power Supply System, 무정전전원장치에 활용되기도 하는데요. UPS는 ESS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데이터 센터나 의료기관과 같이 정전 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시설을 위한 비상 전력 공급장치입니다. 기존에는 내연기관 발전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대용량의 전기차 폐배터리를 여러 개 이어 붙이면 건물에도 사용할 수 있는 UPS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지속가능성이 글로벌 과제로 떠오르면서 친환경적인 전기 에너지를 축적했다 재사용하는 다양한 분야에 전기차 폐배터리가 활용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전기차 폐차, 앞으로 해결할 과제는?

이처럼 폐차된 전기차의 활용 방안은 다양하게 연구되고 있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보다 효율적이고 완성도가 높은 전기차를 만들수록 폐차 시 발생하는 문제점도 커지는 역설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뛰어난 전기차를 만들기 위해 도입된 차체 일체형 배터리팩 구조는 폐차 증가 원인이자, 재사용을 막는 원인입니다. ⓒ Tesla
최신 전기차의 경우 배터리가 차체의 일부를 구성하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경우 전기차의 구조적 완성도가 높아지고 무게를 줄여 주행거리도 늘릴 수 있지만, 반대로 차체가 조금만 손상을 입어도 고가의 배터리를 통째로 교체해야 해 수리비 부담으로 폐차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또한 폐차 시 차체와 일체형으로 설계된 배터리를 분해해 재사용하기도 어렵죠.
효율적인 에너지 관리를 위해 여러 개의 배터리를 하나로 묶는 배터리팩 설계도 재사용을 어렵게 하는 요인입니다. 수십 개의 배터리 중 한두 개의 배터리만 망가져도 배터리팩을 통째로 사용할 수 없게 되기가 일쑤인데요. 이는 전기차 폐차 증가 요인이자 일부만 손상된 배터리팩의 재사용을 막는 요인으로 지목됩니다.
이 밖에도 자동차마다 배터리팩의 형태와 형식이 달라 재사용을 위한 표준 제정이 어렵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에 정부와 자동차 회사들은 전기차 사고 수리비를 절감하는 설계 개선을 통해 전기차 폐차 비율을 낮추는 한 편, 배터리 재사용 및 재활용 비율을 높이고 친환경적인 폐차 프로세스를 수립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EU의 배터리 여권 제도 도식. 배터리의 체계적인 관리는 친환경적인 전기차 폐차를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 GBA
유럽연합(EU)는 배터리 및 자동차 기업과 협업을 통해 2026년부터 전기차 배터리 여권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배터리 여권에는 제조업체, 제조일자 같은 일반적인 정보는 물론 탄소발자국, 공급망 정보, 재활용 소재 포함 비율 등이 기재되며, 배터리 예상 수명과 같이 폐배터리의 재사용 및 재활용을 위한 다양한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민관합동으로 출범한 배터리 얼라이언스를 통해 자동차 등록증에 전기차 배터리 등록번호를 별도 기재해 배터리의 생산, 소유, 정비, 탈거 및 재사용에 이르는 전 생애 주기를 시스템적으로 관리할 방안을 논의 중인데요. 배터리 등록체계가 도입될 경우 폐차된 전기차의 배터리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재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모든 것에 끝이 있다지만, 폐차 후 배터리를 재사용하고 수명이 다한 배터리로 자원을 생산하는 전기차만큼은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 끝없이 생명력을 이어간다고 볼 수 있겠죠? 폐차 이후에도 폐기물이 되지 않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사용되는 전기차의 변신을 EV Infra가 응원합니다!
필진 엘제이
자동차 전문기자 출신 콘텐츠 에디터. 전기 자동차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풀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