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왜 나라마다 주행거리가 다를까?

들쑥날쑥 주행거리, 왜 그럴까?

전기차의 브랜드와 성능, 사양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대다수 소비자들이 전기차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주행거리입니다. 우리나라는 인구의 대다수가 아파트 등 공동 주택에 거주해 충전이 쉽지 않고, 여전히 충전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1회 충전으로 더 많은 거리를 가는 것이 중요하죠.
전기차에 관심이 있어 찾아보셨던 분들은 공감하실 텐데요. 분명 같은 차량에 같은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는데 나라마다 1회 충전 시 주행 가능 거리가 다르다는 점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으셨나요? 가령 유럽에서는 500km를 갈 수 있다던 전기차가 미국에서는 400km, 우리나라에서는 380km 밖에 주행하지 못하는 식입니다.
전기차가 위치를 옮길 때마다 성능이 바뀌는 것도 아닐 텐데요. 적은 수준도 아니고 이렇게 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어느 나라의 주행거리를 믿어야 할까요? 오늘은 전기차 주행거리의 나라 별 차이를 집중 분석해 보겠습니다.

나라마다 다른 주행거리 산출 방식

동일한 성능의 전기차도 나라마다 주행거리가 달라지는 이유는 나라마다 주행거리 산출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기차의 주행거리 산출은 실험실 테스트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사진은 EPA 테스트 장면 ⓒEPA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주행거리 산출 방식은 크게 두 종류인데요. 하나는 미국 EPA(환경보호청)의 테스트 방식이고, 또 하나는 유럽을 중심으로 쓰이는 WLTP 방식입니다.
두 가지 테스트는 모두 실험실에서 다이나모미터를 사용해 진행됩니다. 하지만 그 방식에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요. 무선 EPA의 경우 도심, 고속도로 등 다양한 주행 환경을 고려한 '멀티 사이클 테스트(MCT)'를 실시합니다.
MCT에서는 전기차를 완전히 충전한 뒤 여러 조건에 맞춰 배터리가 완전히 바닥날 때까지 주행을 실시합니다. 이후 총주행거리와 배터리 충전 량을 비교해 전비를 산출하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도심과 고속도로 주행의 가중치를 반영하고, 여러 변수 - 도심 주행, 고속 정속 주행, 고속 급가속, 에어컨 가동, 저온 -를 고려한 5-cycle 보정식을 곱합니다. 이에 따라 최종적으로 EPA 기준의 주행거리가 산출됩니다.
WLTP 기준 700km의 주행거리를 자랑하는 폭스바겐 ID.7. EPA 기준으로 주행거리가 더 줄어들 수 있습니다. ⓒVolkswagen
한편 WLTP(Worldwide harmonized Light vehicles Test Procedure)는 UN 유럽경제위원회에서 제안한 승용차 및 경상용차*용 연비 측정 기준인데요. 유럽 연합을 시작으로 세계 30여 개국이 사용 중인,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기준입니다. 기존에 쓰이든 NEDC(New European Driving Cycle) 방식이 오늘날의 교통 환경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으로 2017년 도입된 새로운 측정 기준이죠.
*경차급 상용차
기본적인 테스트 방식은 EPA와 동일합니다. 실험실의 다이나모미터 위에서 교통 환경을 반영한 시나리오에 따라 가속과 감속을 반복하는 주행 테스트를 실시하고, 여러 변수를 고려한 주행 결과에 보정값을 곱하면 WLTP 기준의 전비와 주행거리를 산출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첫 번째 차이가 발생합니다. 우선 EPA 방식과 WLTP 방식은 각자의 교통 환경에 맞는 서로 다른 시나리오를 통해 테스트를 진행하기 때문에, 당연히 에너지 소모량이 다릅니다. EPA는 미국 환경과, WLTP는 유럽 환경과 더 잘 맞죠.
또 저온 환경이나 에어컨을 강하게 켜는 등 여러 환경을 고려한 5-Cycle 보정식을 곱하는 EPA 방식과 달리 WLTP 방식에서는 별도의 보정식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동일한 차종이라도 통상적으로 WLTP 기준 주행거리가 EPA 기준 주행거리보다 훨씬 길게 나옵니다. 가령 58kWh 배터리를 탑재한 현대 아이오닉 5 RWD 스탠다드 모델의 경우, WLTP 기준 주행거리는 복합 384km이지만, EPA 주행거리는 복합 354km입니다.
그런데 환경부 기준을 따르는 한국에서는 고작 복합 336km로 인증이 났는데요. 까다로운 EPA보다 한국의 주행거리가 더 짧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나라 주행거리가 짧은 이유

한국 환경부 주행거리 측정 모습 ⓒ경향신문
우리나라의 환경부 기준의 경우, EPA 방식을 기반으로 개발됐습니다. 전체적인 테스트 방식이나 시나리오, 보정값 등은 EPA와 대동소이하지만 가장 큰 차이가 있으니 바로 저온 주행 시험입니다. EPA 테스트에선 성에 제거 기능만 작동한 상태로 주행하는 반면, 환경부 테스트에서는 히터까지 최대치로 작동시키기 때문인데요.
겨울철 기온이 낮은 한국의 특성을 반영해 강화된 테스트인데, 전기차의 특성상 난방 기능을 사용하면 배터리 소모량이 큽니다. 때문에 환경부 기준은 EPA 기준보다도 더 짧은 주행거리가 산출되기 마련이고, 수입 전기차의 경우 이로 인해 나쁜 성적을 거두기 일쑤이죠. 환경부의 주행거리 산출 방식이 세계에서 제일 엄격하고 까다롭다고 여겨지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그러면 어떤 주행거리를 믿어야 하나요?

그렇다면 가장 정확한 건 어떤 주행거리일까요? ⓒ Kia
앞선 설명으로 전기차의 인증 주행거리가 'WLTP > EPA > 한국 환경부' 순으로 짧다는 것은 이해가 되셨을 겁니다. 그러면 또 하나 궁금증이 생기는데요. 전기차를 사용하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셋 중 어떤 주행거리를 믿어야 하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알 수 없다"입니다.
너무 무책임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전기차는 운행 패턴에 따라 큰 효율 차이를 보입니다. 물론 내연기관차도 마찬가지이지요. 같은 모델이라도 회생제동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도심 위주의 부드러운 주행을 한다면 더 많은 거리를 달릴 수 있고, 고속 주행이 많고 에어컨과 히터를 강하게 켠다면 인증 주행거리보다 짧은 주행거리가 나올 수도 있죠.
때문에 WLTP, EPA, 환경부의 산출 방식 중 어떤 것이 정확히 나의 주행 패턴을 반영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긴 WLTP 주행거리보다 더 먼 거리를 한 번에 달릴 수도 있고, 또 짧은 환경부 인증 주행거리보다도 실주행거리가 짧을 수도 있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각각의 테스트 방식이 모두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일종의 '경향성'은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전기차 A, B가 있을 때 WLTP 기준으로 A는 400km, B는 500km를 달린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내가 A를 운행하면서 350km 정도의 실주행거리를 기록했다면, B를 운행했을 때 약 440km 정도는 주행할 수 있겠다는 추정이 가능하죠. 실제로 EPA나 한국 환경부 기준의 인증 주행거리도 이러한 경향성을 반영하고요. 물론, 특정 모델의 구동 로직과의 궁합에 따라 유독 더 멀리 갈 수 있는 모델도 있겠지만요.
주행거리의 정확성보다는, 내 주행 패턴에 맞는 전기차를 고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BMW
따라서 나의 운행 환경과 주행 습관 등을 고려했을 때의 실주행거리는 여러 산출 방식의 결과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인증 주행거리의 경향성을 참고하면 해당 모델의 실주행거리를 가늠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죠? 내연기관차의 공인연비가 대략적인 효율을 가늠하는 참고 자료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직까지는 충전의 불편함과 여러 제약으로 인해 이러한 공인 주행거리를 신경 쓰기 마련이지만, 앞으로 더욱 빠르고 편리한 충전 기술이 개발된다면 이러한 주행거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겠죠? 지금 타는 전기차의 주행거리가 짧더라도, EV Infra를 활용한다면 걱정을 덜 수 있다는 점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필진 엘제이
자동차 전문기자 출신 콘텐츠 에디터. 전기 자동차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풀어드립니다